삶이 다시 경이로워질 때(욥기 39:19-30)


19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20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21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22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23 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24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25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 26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27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28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29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30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




[설교요약] 삶이 다시 경이로워질 때(욥기 39:19-30)


예수님은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공중의 새를 보라 …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 보라…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은 날아가는 새를 향해 고개를 들고, 가꾸지 않은 백합화를 오랫동안 보며 생각하는 예수님의 요구 과정을 생략한 채 즉시 감동과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직접 새를 관찰하고 백합화를 지켜보며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발견하기를 원하십니다.
 
나태주 시인도 <풀꽃>이란 연작시에서 이렇게 우리를 설득합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너를 입히시고 돌보신다. 무조건 믿어라”하며 맹목적 믿음을 주입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기르지 않고, 제어할 수 없는 야생세계, 오롯이 하나님 섭리로 유지되는 세계를 향해 눈을 뜨고, 생각을 넓힐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 과정이 없다면 바른 믿음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입술로는 “그래 하나님이 나를 지키실 것이다”“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안전하게 하실 것이다” 라고 성급하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실생활 속에서 작은 불편과 잠시도 견디지 못하고 허둥대며 평안과 안전감을 상실할 것입니다.  
    
40년간 물리학과 천문학을 가르친 쳇 레이모 교수는 <아름다운 밤하늘>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에세이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밤의 자식들이다. 인류는 산업스모그나 인공 빛에도 전혀 희미해지지 않는 찬란한 별빛 아래서 성장했다. 기나긴 어둠의 시간 동안은 잠을 자거나 머리 위에서 아름답게 움직이는 광점들을 지켜보며 경탄하는 것 이외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별들을 보며 희망을 갖기도 하고 또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그들은 천체들 가운데서 적절한 숭배 대상들을 찾았고, 특히 온기와 빛을 주는 태양을 섬겼다. 비는 별들의 움직임에 따라 오고 그쳤다. 강이 범람하거나 토지가 비옥해지는 것 그리고 자연의 횡포도 언제나 별과 함께했다. 느닷없이 나타나는 혜성, 하늘의 빛을 갑자기 없애 버리는 일식과 월식, 어디선가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별들은 우리 조상들을 혼란에 빠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혼돈 속에서 질서를 발견했다. … 현대의 우리는 조상들이 밤에 대해서 가졌을 친밀감을 상상하기 어렵다. 오늘날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위성사진들을 보면 우리 행성의 밤 쪽이 인공 빛으로 번쩍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시가 근교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조상들에게는 태양이나 달만큼 친숙했던 것들을 전혀 보지 못한 채 죽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은하수, 플레아데스성단, 성운, 희한한 혜성, 황도광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는 저녁 시간을 심연과도 같은 하늘이 주는 아름다움과 공포를 잊어버린 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보낸다.”  *쳇 레이모 <아름다운 밤하늘> p.7.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깊은 밤 밖으로 불러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보게 하십니다. 수 많은 별을 보며 경외감에 사로잡힌 순간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4) 약속하십니다. 이처럼 공중의 새와 백합화를 보라고, 그리고 밤하늘을 보라고 그것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라고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경이감(wonder)”을 통해 믿음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익숙한 인간의 손길을 벗어난 날것의 아름다움, 안전을 위해 우리가 설치한 울타리를 침범하는 공포로 “경이감”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도달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경이'란 무엇일까요? 변증신학자인 라비 제커라이어스 경이로움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경이로움(wonder)이란 절대로 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감성을 황홀하게 만드는 마음의‘그 사로잡힘’이다. 그것은 현실을 단단히 그러잡고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절정을 느껴야 할 필요도 없거니와, 삶의 투쟁에서 비롯되는 좌절과 낙담이 있다고 해서 취약해 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가운데 비범한 것을 알아보며, 그 비범함 속에서 아미 알고 있는 것을 재확인한다. 경이로움은 영혼(영적인 것)을 굳게 움켜 쥐면서도 몸(물질적인 것)으로 누낄 수 있다. 경이로움은 매 순간을 즐기면서도 영원의 눈으로 해석한다.”*라비 캐커라이스 <경이로움> p.44.

이런 면에서 우리가 살아온 도시의 안전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질서정연한 세계에 감정도, 차별도, 인정도 없이 공격하는 것을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자세히 보며,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작 우리는 바이러스가 주는 공포와 아름다움을 잊어버린 채 또 텔레비전, 스마트폰, 모니터 앞에서 남들이 본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할 뿐 이 현상을 통해 회복해야 할 "경이감”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욥기를 통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정의를 찾을 수 없는 재난을 당한 성도의 신앙분투를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욥이 감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쏟아 부으심으로 답변을 대신하십니다. 그리고 새를 보고, 백합화를 보고, 별을 보라고 말씀하듯 다시 한 번 사람이 기르지 않고 돌보지 않는 동물의 왕국을 보고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텔레비전과 스마트폰 대신 성경을 통해 보고 생각하므로 다시 경이로움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은 욥과 우리를 동물의 왕국으로 초대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이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동물들이 살아가는 일곱 현장을 살펴 봅시다.   

1. 사자 새끼와 까마귀 새끼(38:39-41) : 포식자와 먹잇감

첫 번째 현장은 포식자와 먹잇감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야생에는 포식자와 먹이, 먹는 자와 먹히는 긴장이 있습니다. 먹이가 희생되지 않으면 스스로 사냥할 수 없는 사자 새끼와 힘없는 까마귀는 굶어 죽게 됩니다. 한쪽이 죽어야 다른 쪽이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생의 세계는 정의도 연민도 없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대체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은 욥에게 자신이 사자 새끼를 위해 사냥하고 식욕을 채우는 자이고(39절) 까마귀 새끼의 생존을 위해 먹이를 공급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시 147:9). 먹잇감의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겨 죽을 때 이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까마귀들을 위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시 104:21-22) 언젠가 우리는 누군가의 생존을 위해 한 사람이 죽음으로 모두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응답이 오리라는 더 깊은 진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고난에 담긴 감추인 진리를 속에서 하나님의  “경이”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 산염소와 암사슴이 새끼를 낳는다(39:1-4) : 시간과 생명

두 번째 장면은 생명이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산염소와 암사슴이 몇 달만에 새끼를 낳는지 “때를 아는냐”고 물으십니다. 여러 달 기다리고 고통을 겪은 뒤에야 새 생명이 시작되며, 자라서는 독립적으로 어미 품을 떠납니다. 기다림과 고통과 환란 때를 주신 하나님이 출산과 생명의 때도 주십니다. 

욥은 고난을 통과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시간을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잘못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여러 달”(7:1-3)을 그리고 고통이 찾아오는 “아침마다, 순간마다”(7:18) 하나님이 불의한 시간의 주인이라고 토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의 의로운 주인이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때를 머리로만 아시는 분이 아니며, 직접 보살피며 아시는 분입니다. 냉담한 산부인과 의사가 달수를 세듯이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때의 문제는 기다림입니다. 잉태를 기다리는 시간, 분만의 고통이 있지만 그 시간 조차 기다림과 희망이 동반합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염소와 사슴의 생명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시간이 인간들에게도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이감에 사로 잡힐 때 우리는 의로운 시간의 주인에게 자신을 맡길 수 있습니다. 때가 차면 하나님이 모든 악을 잠재우고 새생명을 주시기 위해 인류 역사 분기점을 펼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새생명을 얻은 자녀들은 빈 들에서 강해져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3. 들나귀가 추구하는 자유(39:5-8) : 자유와 생존

세 번째 장면은 푸른 풀을 찾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들나귀입니다. 들나귀는 자유롭고 야생적입니다. 들나귀는 인간이 아무리 좋은 축사를 마련하고 좋은 사료를 공급할지라도 오히려 황량한 땅 마치 죽음이 가까운 곳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들나귀의 선택, 들나귀의 자유와 생존은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동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벗어난 이상한 부분은 없습니다. 길들여 진 것만 생존하지 않습니다. 살 수 없는 땅을 자신의 거처로 머물기 원하는 들나귀의 생존에서 오히려 척박한 개척자의 삶을 선택하는 그리고 불가능한 장소에서 삶을 유지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며 경이감에 빠지게 됩니다. 

4. 들소의 공포(39:9-12) : 두려운 죽음의 위협

네 번째 장면은 야생 세계에서 만나는 공포스런 힘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들소는 전설적인 공포를 상징합니다. 다윗은 “들소의 뿔에서 구원받는 것과 사자의 입에서 구원받는 것”을 동격으로 언급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민 23:22)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너 들소 한 번 길들여 봐라 들소가 네 말을 듣고, 멍에를 메고, 네게 복종하는지 한 번 해 볼렴?” 어리석은 농부라도 이처럼 사나운 소를 길들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울타리 너머에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거친 동물, 위험한 동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만약 이런 힘을 가진 동물을 진짜 길들일 수 있는 분, 지혜가 있다면 오직 하나님 외에는 없다고 암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거칠고 위험한 힘센 들소를 복종시켜 자기 목적에 맞게 사용하실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지헤로운 분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길들일 수 없는 죽음을 복종케 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를 멸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히 사단을 자기 목적에 맞게 멍에를 지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사단은 자신이 멍에를 맨 들소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네 번째 우리에게 주시는 “경이감”입니다. 

5. 타조(39:13-18) : 어리석음과 탁월함

다섯 번째 동물은 타조입니다. 하나님은 타조의 이상함을 보라고 하십니다. 타조는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하는 이상한 조류입니다. 그런가 하면 애써 낳은 알을 버려두고 낭비하는 매우 어리석은 짐승입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핵심이 있습니다. 비록 타조는 날 수 없지만 말이 따라잡지 못할 만큼 빨리 달릴 수 있습니다. 타조는 말 탄 자들을 우습게 여깁니다. 즉 권력자들을 무시하는 야생동물입니다. 하나님은 엄청 빠르지만 일반상식에 반하는 생명체를 지으시는 분입니다. 
  
우주에는 이해하지 못할 이상함과 역설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에 더 많은 역설적인 문제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자신이 경험한 이상한 사건 하나를 언급합니다.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전 9:15)

어느날 사람들을 치유하고 돈한 푼 받지 않고, 물 위를 걷고, 왕이지만 어린 나귀를 타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수 많은 군대를 가졌으나 싸움을 말리며 스스로 죄인처럼 죽는 특별하고 놀라운 인물이 세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마치 이분은 타조처럼 철저히 바보 취급을 받으며 생을 마감하겠지만 이분이야말로 어떤 말 탄 자들보다 빠르게 우주의 목적에 도달하는 분이 될 것입니다. 이 타조의 역설과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는 “경이감”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6. 군마의 두려움(39:19-25) : 통제할 수 없는 권력

군마는 힘의 전형입니다. 고대 전투에서 말 한마리는 일반 사병 100명의 힘을 능가 했습니다. 천둥같은 군마의 갈기, 장애물을 뛰어 넘는 능력, 말의 위엄은 보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군마는 지켜보는 사람은 누구든 죽음, 전쟁의 패배와 심지어 지옥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위엄스럽다”“두렵다”는 단어는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시 104:1). 전쟁터에서 군마를 만나는 것은 공포그 자체입니다. 아무도 군마를 막지 못합니다. 군마는 신과 비슷하며 초자연적이고 두려움을 주는 생명을 빼앗아 가는 생명체입니다. 이 생명체는 죽이기 위해 존재하며 피 냄새에 익숙한 공포스런 생물입니다.  

그러나 이쯤 되면 우리는 야생 세계가 아닌 하나님께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군마에게 갈기를 주고, 뛰는 힘과 짓밟는 본성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군마에게는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군마의 힘 본성의 원천인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전쟁에서 이길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오직 한 분에게 엎드리고 그분에게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사스, 신종플루, 코로나19 등 인류는 바이러스와의 국지전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길 희망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7. 매와 독수리 사냥과 거처(39:26-30)

마지막 현장은 포식자와 피포식자 첫 번째 현장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독수리와 매는 접근이 불가능한 높은 절벽에 둥지를 틀고 삽니다. 수 백미터 상공에서도 풀 사이 작은 들쥐를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날아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낚아채 새기들의 먹이감을 삼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물으십니다. “이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즉하나님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지혜 자신의 명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크리스토퍼 애쉬 목사님은 <십자가의 지혜 욥기>에서 이 부분을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포식자들이 피포식자를 죽여도 좋다고 허용하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포식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30절 끝에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새끼 독수리들이 시체 주변에 있는데 그 입에서 피가 뚝뚝 덜어진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 크리스토퍼 애쉬 < 십자가의 지혜 욥기> P.560.
  
하나님은 야생 세계, 동물의 왕국을 보라고 하십니다. 오랫 동안 보고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세계는 감동을 받고 위로를 받기에 적합한 현장이 아닙니다. 하늘의 별을 보라,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야생의 포식자의 잔인한 사냥과 힘, 어리석음과 탁월함, 들소의 공포스런 힘과 들나귀의 야생성을 펼쳐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만 보여주고, 들려주고 먹이고 싶은 뻔한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시지 않습니다. 어린 자녀에게 어떻게 안전함과 좋은 것만 제공하고 나쁜 것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는 초보 부모들과 하나님은 다른 분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반짝이고, 멋지고, 화려한 장면들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보여주고 그 사진들만을 전시하며 찬양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이 태어남과 성장과 잔인하고 노골적인 장면 그리고 죽음까지 그대로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주 안에 죽음 폭력 포식 위험 공포가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세상과 떼어내거나 분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죽음 없는 생명이 없고. 죽음을 떼어내고 생명만 남겨 둘 수 없습니다. 

욥은 악과 고난의 문제에 얄팍하고 진부하고 상투적인 해답을 기대하는 인류에게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진짜 하나님의 지혜를 보고 생각하라고 그리고 경이감에 사로잡히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출발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동물의 야생 세계를 주목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생의 세계는 인간이 만든 농장이 아닙니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을 대표합니다. 즉 인간의 보살핌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그러나 실제하는 세계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보살피고 가꾸고 통제할 수 있는 농장 울타리 안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야생 동물이 이 울타리를 침범해 들어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상치 못한 무질서와 혼돈이 질서 잡힌 정형회 된 익숙한 우리 세계를 망가뜨릴 때, 그래서 우리의 계획과 희망을 갈가리 찢어 놓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도 태어남과 생명, 죽음과 썪음이라는 양 극단이 균형을 이루며 유지되고 있습니다. 약하여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동물들의 새끼들을 돌보시고, 어리석지만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탁월함으로 세상을 유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기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결론 / 삶이 다시 경이로워질 때 믿음이 다시 시작됩니다. 

이렇게 욥이 동물의 세계를 관람하며 경이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욥을 “트집 잡는 자, 하나님을 탓하는 자(40:2)”라고 질책하십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실수하지 않는다. 너의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무엇이 불필요한지 알고 있다. 세상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내가 모르는 일, 나의 통치를 벗어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나는 날짜만 세지 않는다. 사랑으로 지켜보고 있다. 나의 지혜는 완벽하다.”

로날드 D. 게르슈테는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라는 책에서 인류 역사 가운데 나타난 다양한 전염병과 질병을 연구하고 다음과 같은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전염병과 질병은 무의미 하지 않다. 전염병은 자주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을 무력화시켰다. 신이라고 주장한 왕은 질병으로 무너졌고, 페스트는 무모한 십자군 원정을 그치게 했다. 절제를 모르는 부유한 사람들이 통풍으로 고생하며 삶에 한계를 절감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난공불락의 절벽에 둥지를 튼 독수리처럼 온갖 편의 장치와 안전망으로 아름답게 건설된 도시라는 울타리를 침범한 야생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살신성인하는 의료진을 보며 감동받고 빨리 이 바이러스가 종식되어 안전한 상황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현장을 보라고 지시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질서정연한 우리의 통제를 받는, 우리가 길들여온 세상이 아닌 야생의 세계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경외감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무관심한 산부인과 의사처럼 날짜를 세지 않으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다시 한번 라비 제커라이어스 경이로움에 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 경이로움은 삶의 황홀함을 생생한 것으로 만들며, 언제나 어디서 그런 황홀감이 있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경이로움은 빛의 본성을 알고 있으므로 그림자를 읽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빛을 똑바로 쳐다볼 수는 없으되, 빛이 없이는 다른 어떤 것들도 볼 수 없다는 사실도 경이로움은 잘 안다.  

경이로움에 사로잡힌 다윗은 시편 8편에서 이렇게 찬양합니다.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울타리가 무너지고 야생의 세계가 우리를 침범했습니다. 그러나 경외감을 일꺠움으로 새롭게 믿음을 회복하십시요. 그러면 이 어려움 조차도 무의미한 두려움이 아닌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고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